루틴이 무너졌다.
일어나는 것도 조금 느슨해지고, 무엇보다도 산책 나가는 것을 안하고 있다.
선우는 눈을 떠 내 상태를 체크하고 산책을 가고싶으면 가자고, 안가고 싶으면 안가도 된다고 내 의사를 물어봐준다.
마음은 안가고 싶은데 괜히 작심삼일 등의 죄책감으로 주저하면, 괜찮다고, 너 하고싶을 때 하는 것이 제일 좋은거라고 운동 몇 번 거른다고 큰일 나는 것은 아니라고 내 마음을 안심시켜준다.
마음이 급해졌다.
날이 추워지고 있고, 텃밭에는 아직 채 익지 않은 토마토들이 그대로 달려있다.
호박들과 수세미도 정리해두어야 하는데.
산책과 운동보다는 얼른 토마토들을 수확해 그린토마토 살사와, 그린토마토 처트니를 만들어 캐닝을 해둬야 한다.
고추들도 얼른 수확해 손질하고 얼리거나 건조해두어야 하고,
수세미도 끓는물에 삶아 수세미로 만들어 말려두어야 한다.
그래야 텃밭에서 여름내내 잘 자라준 식재료들이 허투루 버려지지 않지.
그래서 산책과 운동을 포기하고 토마토를 손질하고 고수와 오레가노, 타임, 할라피뇨와 양파를 잘게 다져 살사를 만든다. 기존에는 한두끼 먹을 양만큼 날것 같은 살사를 만들었는데 이제 겨우내 먹을 저장용 살사를 만들어야 해, 레시피를 새로 만들었다.
다행히 내 허브텃밭에 아직 오레가노와 고수가 남아있더라.
토마토를 늦게 심어 이때까지 다 안익어서 양이 꽤 된다. 하긴 다 익었으면 살사나 처트니가 아닌, 토마토 페이스트를 만들었겠지.
아주 초록색인 토마토를 다지고 양파도 넣고, 대파도 다져 넣고. 한솥 가득 푹푹 끓이면서 옆에는 캐닝용 유리병을 삶는다.
고수와 오레가노 같은 허브류는 제일 끝에 넣고 레몬쥬스가 없어서 생레몬 즙을 내어 넉넉하게 넣어준다.
서너시간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선우가 작업하다가 중간중간 내려와 내 컨디션을 체크한다.
절대 무리하지 말것, 을 신신당부한다.
고되긴 한데.. 시간이 너무 없다.
그래서 마음이 급하다.
수요일 조직검사결과가 나오는데, 그 날의 결과에 따라 모든 일정이 다 바뀌는거니까.
그 전에 할 수 있는 것과 해야할 것들을 잘 구분해서 미리 마무리 해둬야지.
혹시 모르니 수요일 결과 들으러 갈 때 간단히 입원짐을 싸두어야겠다고 선우에게 말하니, 아니라고 괜찮다고. 혹시나 당일 입원하라 하면, 가까우니 짐 가질러 집에 들르면 되니, 그런거까지 미리 마음쓰지 말라고 한다.
입원할 때 뭘 챙겨야하나.
속옷과 세안도구와 수건과 베개와 선우 베개와 이불과 가습기와 텀블러와 휴지와 커피정도?
고선생도 챙길 수 있으면 좋겠다. 고선생 혼자서 심심하겠네…
아직 내 종양이 어떤 녀석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모든게 다 깜깜하다.
수술 날짜가 잡히는게 먼저인지,
아님 수술 전에 항암을 해야하는지,
혹은 수술후에 그냥 끝인지, 아님 항암을 해야하는지 등등
모든게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영역이다보니 현실감이 많이 없다.
뭐 되는대로 하겠지. 닿는대로 발을 뻗겠지.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해야하는 일을 챙겨가며 하다보면, 수술이던 항암이던 코앞으로 다가오겠지.
그럼 또 하면 되는거지. 느슨느슨하게 하루씩만 잘 살아내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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