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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hions

새로운 녀석이 나타나면, 나도 변해야지.

by hionsK 2023. 11. 14.

 

 

 

일상이 생겼다.
이제 우리는 시도때도 없이 병원을 들락날락 거릴 것 같은데,
늘 오후 3~4시에 일어나서는 안될거 같다며.

선우의 목표는 아침 8시 기상이다.
당분간 적응하기 위해 아침 10~11시사이에 일어나기로.

우선 선우는 일어나선 거실 커튼을 열고, 블라인드를 올려 채광을 높인 후, 내 방으로 달려온다.
안녕? 하고 나와 눈을 맞추고 내 다리 맡에서 골골거리며 기다리는 고선생에게 몸을 낮춰 그루밍을 도와준다.

나는 일어나 조금 따뜻한 옷을 걸치고, 세안을 하고, 뒷 주방의 효소병들을 한번 열어 섞어준다.
그 사이에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신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앉아 전날의 일상을 기록하면, 선우가 정성들여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마시며 선우는 스트레칭을 하고 나는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작은 보온병에 차를 옮겨담고 나갈 준비를 한다.

가볍게 입고 작은 배낭을 메고 가까운 절과 제일 높은 고개를 향해 왕복 3km, 50분정도 선우랑 슬슬 걷다가 돌아온다.
햇살 가득한 발코니에서 우리를 발견한 고선생이 나도 나가겠다고 하면, 문을 열어주고 고선생과 다시 짧은 산책을 30여분 하며 텃밭을 정리하고 늦은 농작물을 수확하고.

그리고는 선우는 작업실에 올라가 일을 하고 나는 쉬거나, 캐닝을 한다.

캐닝을 한다. 그 시간은 집중이 참 잘된다. 빨간토마토는 토마토 페이스트를 만들고 그린토마토는 chutney와 Salsa를 만든다. 일년치 준비해두어야지.


우리는 늘 자정에 밥을 먹었는데, 그 때 밥을 먹으면 보통 아침 7시 경 잠들게 되어 밥먹는 시간도 조절해야했다.

7시부터 저녁을 준비해서 8시에 먹기로.
밥을 먹고는 설거지는 다 미뤄버리고
영화 한편 보면서 쉬다가 씻고 그대로 잠들자고.
그래서 자정에는 각자의 방 앞에서 내일 보자, 고 인사하고 개인시간을 보내다 잠든다.

선우는 늘 밥 먹고 너저분한게 싫다고 설거지를 거르는걸 싫어했는데, 당분간은 루틴을 만들기 위해
12시에 자리에 눕기, 를 열심히 실천하고 있다.

나와 선우는 둘 다 야행성.
밤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소중해 자는게 아까울 정도라,
여행 중 만나 같이 지내기 시작한 때부터 십수년 간 내가 한국에 들어와 잠시 회사를 다닌 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야행성으로 지냈다.
그러니까 밤 시간은 고즈넉히 각자 즐기다 자고플 때 자고, 오후 느즈막히 일어나고플 때 일어나고.

태국에서의 아침밥(야행성 인류의 흔한 밤 9시에 먹는 첫끼)


그렇게 살던 우리가 아침형 인간이라니.

이게 모두 저 못되쳐먹은 암쉥키 때문이야!

라고 암을 탓하려 해봤는데..
사실 아침의 시간도 엄청 매력이 넘치더라.
이슬 반짝이는 숲길을 선우와 걷는게 참 행복하더라.

이 길 따라 쭉 가면 엄청난 절경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산책을 두탕이나 뛰고(인간산책/고선생과의 산책) 차나 커피를 마시며 수다떨고 쓰윽 청소기도 돌렸는데도!
아직 해가 있어!!
심지어 점심도 안되었어!
원래는 느즈막히 일어나면 바로 옷입고 고선생 데리고 나가 산 넘어가는 해 잡으며 조급하게 산책을 했는데 말야.

해가 이리 짱짱하다니.

우리는 사실 해를 사랑하는 박쥐들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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